
최근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 공약으로 내세웠던 ‘약가 인하’와 ‘의약품 공급망 강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 수입 의약품에 대한 관세 부과를 예고하며 자국 내 생산 확대를 유도하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밝힌 데 이어, 5월 12일에는 약가 인하와 관련된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수입 의약품의 관세 범위와 수준, 규제 기관의 대응 등 여러 불확실성이 존재하는 가운데, 제약산업 전반은 관망세를 유지하며, 정책 변화에 따른 유연한 대응 전략 마련에 분주하다.

“OECD 국가 중 최저 수준 약가 낮출 것”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5월 12일 가장 유리한 국가(MFN) 정책을 도입하고, 미국 내 처방약 가격을 OECD 국가 중 최저 수준으로 낮추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백악관은 MFN 정책을 통해 미국인의 약가 부담을 최대 90% 줄이고, 외국의 ‘무임승차’를 방지하여 제약산업의 공정성을 확보할 수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제약사들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개발한 신약을 유럽 등 선진국이 자국의 약가 정책을 통해 저렴한 가격에 구매해 왔다며, 높은 약가를 지불하는 미국이 제약사의 R&D 비용을 사실상 부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번 행정명령에는 제약산업의 구조적 개혁을 통해 제약사의 독점 유지와 약가 인상 관행을 근절하고, 제네릭과 바이오시밀러 승인 절차 간소화를 통한 시장 경쟁 촉진 등의 내용이 포함됐다. 미정부는 약가 인하를 위해 제약사와 협상을 시도하고, 180일 이내에 의미 있는 진전이 없을 경우 규제 기관을 통해 의약품 수입 확대, 수출 제한, 불공정 행위 단속 강화 등의 조치를 예고했다. 또 약가 정보에 투명성을 제공해 환자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소비자와 제약사 간 직접 거래가 가능한 메커니즘을 구축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이밖에 국제 시장에서의 불공정한 가격 책정 관행을 조사해 이를 시정하고, 미국 제약산업의 공정한 경쟁을 지원하겠다는 의지도 드러냈다.
이에 앞서 트럼프 행정부는 외국산 의약품 및 원료 의약품이 국가 안보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도록 지시하고, 조만간 의약품에 대한 관세를 발표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만약 의약품 관세가 부과된다면 철강·알루미늄, 자동차·자동차 부품에 이어 세 번째 품목별 관세가 된다.
관세 대비로 분주한 미 의약품 유통업계
트럼프 대통령이 의약품 관세 부과를 예고한 이후, 미 약국들은 당뇨·혈압 등 수요가 높은 처방약 비축에 나선 모습이다. 미국 공영방송 NPR은 5월 13일 약국들이 관세 부과로 주요 의약품의 가격이 크게 인상될 것에 대비해 최대한 많은 양의 의약품을 사들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마진 폭을 줄여 대형 약국 체인과 경쟁하는 소규모 약국의 약사들은 의약품 관세가 부과될 경우 미국이 오랫동안 겪어온 의약품 부족 현상이 더욱 심화되고, 전체적인 가격 인상도 피할 수 없게 될 것으로 전망했다.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벤자민 졸리 약사는 NPR과의 인터뷰에서 판매할 6개월치 의약품을 확보해 두었다며, 향후 의약품 가격이 크게 인상될 것을 우려했다. 그는 “원칙적으로는 미국이 높은 의존도를 보이는 중국이나 인도 등이 전쟁 등을 이유로 수출을 중단할 경우를 대비해, 의약품을 미국 내에서 제조하는 것이 맞지만 이를 유도하기 위한 방법이 관세가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설명했다. 이어 “향후 의약품 구입에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은 확실하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지난 3월 미국의 의약품 수입은 큰 폭으로 증가했다. 미 센서스가 지난 5월 6일 발표한 미국 수출입 동향 데이터에 따르면 3월 한 달간 미국으로 수입된 의약품은 500억 달러로 이는 지난 2024년 한 해 동안 수입된 의약품의 20%에 달하는 규모다. 또 미국의 주요 의약품 수입국인 아일랜드의 대미 무역 흑자 규모(상품 기준)는 지난 3월 처음으로 중국을 넘어섰다. 옥스포드 이코노믹스의 매튜 마틴 시니어 미국 이코노미스트는 “3월 미국의 수입 증가는 소비재가 견인했다”며 “이 가운데 의약품이 차지하는 폭이 매우 높았으며, 이는 대부분 아일랜드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체중 감량 의약품을 포함해 글로벌 제약사 상당수가 아일랜드에 제조 시설을 운영하며 미국으로 의약품을 수출하고 있다.
광범위한 의약품 부족 사태 우려
트럼프 대통령이 수입 의약품에 관세 부과 계획을 밝힌 데 이어 약가 인하를 위한 수입 의약품 확대 가능성이 발표되자 업계는 혼란에 빠졌다. 제약산업 공급망을 미국 중심으로 재편하고, 미국인들에게 보다 저렴하게 의약품을 제공하자는 취지는 이해하나 수입 의약품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면서도 약가 인하를 위해 의약품 수입을 늘리겠다는 정부의 정책이 서로 상충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과 제약업계 관계자들은 트럼프 행정부의 이 같은 정책이 글로벌 시장에서 미 제약산업의 리더십 지위를 약화하고, 향후 투자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제약협회(PhRMA)의 스티븐 우블 회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약가 인하 행정명령 서명 소식이 전해진 지난 5월 12일 성명을 통해 “약가 인하 정책은 회원사의 수천 억 달러 규모의 투자 계획을 위태롭게 하고, 일자리와 경제를 위협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원가 절감을 위해 중국 등 저비용 국가에 대한 의약품 및 원료 의존도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다”며 “약가 인하를 위해서는 중간 유통 단계에서 지불되는 높은 비용을 먼저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 바이오협회(BIO) 역시 같은 날 성명을 발표하고, 중국과 같은 사회주의 국가로부터의 의약품 수입은 미국의 경제와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고 밝혔다.
관세 부과로 미국을 중심으로 의약품 제조 공급망을 재편하겠다는 미국 정부의 목표 달성에 큰 효과를 내지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관세 부과가 일부 품목의 리쇼어링을 이끌 수 있겠으나 제네릭 의약품 의존도가 높은 미국 의약품 소비 시장의 구조상 그 효과가 광범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제약 업계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번 행정명령이 약가 인하로 이어질지 여부에 대해서도 다소 회의적인 입장이다. 이번 행정명령 시행과 관련, 제약업계와 미국 정부 간 법적 공방 가능성으로 정책 실행에 불확실성이 높은 데다 생산 인프라가 부족한 현 상황에 부과되는 관세는 오히려 의약품 가격을 올릴 수 있다는 분석이다.
한편, 의약품 지출 절감을 위한 제네릭 의약품과 바이오시밀러 수요 확대는 국내 기업의 미 시장 확대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미국 내 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KOTRA 뉴욕 무역관과의 인터뷰에서 “미 정부가 제네릭, 바이오시밀러 도입 확대를 위해 FDA 절차에 속도를 낼 가능성이 있다”면서도 “최근 연방정부 대규모 감원 사태 등으로 현실화 될 수 있을지 여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출처 : KOTRA 해외시장뉴스>
최민호 기자fmnews@fmnews.co.kr